<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 호모 데우스는 가능할까
기술혁명 이후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자연스럽게 이 책을 펼쳤다. '노동의 종말'로 더 편히 사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았을까, 책을 보기 전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희망 섞인 판타지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인류의 소멸에 관한 고민을 가득 안고 책을 덮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혁명이 도래하면 인간(사피엔스)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인가. <호모 데우스>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가 유발 하라라는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한다.
작가는 차근차근 인간이 어떻게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는지 보여준다. 터무니없는 내용처럼 느껴지다가도 종교와 역사, 심리학, 생물학(유전공학, 뇌 인지과학), 진화 이론 등 작가가 풀어놓는 지식의 방대함을 마주하면 꼬리를 차분히 내리게 된다. 논리 전개와 스토리텔링이 탁월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데,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영화에 몰입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작가의 논리를 쫓아가다 보면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린다. 동시에 인류 스스로 소멸을 자초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항상 무언가를 극복해야 했던 인류의 과제는 이제 자기에게 칼을 겨눈다. 그렇게 인간 존재 자체를 극복하는 과제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끊임없이 위협했던 게 있었다. 바로 기아, 역병, 전쟁이다. 굶주림으로, 전염병으로, 전쟁으로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한순간 사라지는 것이 일상적인 사건이었다. 수많은 지도자가 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힘썼지만 물거품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자연히 기아, 역병, 전쟁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인류의 의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새로운 천년이 들어선 현재, 기아와 전염병, 전쟁으로 갑자기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류는 이제 이 의제를 극복했다. <- 과연 그럴까? 코로나 이전에 쓴 리뷰이다. 현재에는 다른 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히려 굶주림보다 폭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더 많아졌다. 당연하게도 인류가 극복해야 할 의제는 변해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서 벗어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면서, 나아가 신(God)과 같은 힘을 가지는 것. 새로운 천년 인류의 의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되었다. ‘인본주의가 품어온 오랜 이상의 논리적 결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의 진화는 시작되었다. 또 그렇게 인본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 책의 내용을 요약정리한 깔끔한 글을 쓰려는 욕심을 부려봤는데, 정말 욕심이었다. 그렇다! 욕심이 과하면 힘들다. 파편적으로라도 내 생각과 감정,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그냥 적어야지. (역사, 인본주의, 미래에 대한 끄적임)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가치와 규범이 지배하고 독특한 정치 경제 제도가 운용되는 역사적 현실에 놓인다. 그런 현실이 운명이고 필연이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 세계가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창조되었고, 역사가 우리의 기술, 정치,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 두려움, 꿈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조상들의 무덤에서 과거의 차가운 손이 쑥 올라와 우리 목을 틀어쥐고 우리의 시선을 단 하나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른 미래를 상상하려는 시도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p91~)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진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들은 대개 역사 다시 쓰기에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총파업, 자기 몸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에 당신이 찬성하든 안 하든, 이러한 운동의 첫 단계는 역사 다시 말하기다. 새로운 역사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운명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지금과 달랐던 때도 있었다.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가 아는 부당한 세계를 창조했을 뿐이다.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 과정을 공부하고, 미국 흑인들이 노예무역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p93)
인간과 동물은 왜 다른가. 어떤 차이가 존재하기에 동물은 인간의 지배를 받고, 인간은 다른 동물 위에 군림하는 걸까.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뉴런을 중심으로 설명한 뇌과학을 봐도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현대 과학은 아직도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뇌에서 어떤 전기신호가 오고 가고 수백억 개의 뉴런이 작동하는 데, 그 신호가 어떻게 '분노'나 '기쁨'의 감정을 일으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에게도 마음이 존재한다. /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넘어선 상호 주관적 실재가 인간에게만 가능했는데, 이게 바로 결정적 차이다. 돈, 문자, 국가라는 사회적 약속을 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인데, 이런 사회적 약속은 상상의 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화, 이집트 파라오, 기독교의 신은 상상의 질서에 대표 주자고, 이런 질서는 낯선 대상과도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도식적으로 정의하면, 윤리적 판단+사실적 진술=실질적 지침이다. 종교 교리에서 판단한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있고, 사회구조를 공고히 하는 어떤 사실적 진술이 합쳐져, 종교는 구원을 무기로 신도들에게 실질적 지침을 내린다. 낙태에 관한 논쟁이 대표격이다. 그런데 과학적일 수도, 문화적일 수도 있는 관점에서 보면, 어느 시점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세포분열이 일어날 때?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극단적인 예지만, 이누이트족은 아이의 이름이 불릴 때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고 봤다. 누군가에게 호명당한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누이트족은 이름이 부여되기 전의 아이들은 생명이 없다고 생각해 이름이 지어지기 전의 영아를 죽이는 걸 당연시했다고 한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한다. 종교는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바꿀 수 없는 어떤 도덕 법체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p252)
인본주의가 중요한 키워드로 나온다. 인본주의란 모든 걸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세계관(혹은 종교-책에선 종교라고 정의한다)이다. 인본주의 이전에는 유신론의 세계였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아직도 신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긴 하다. 신의 세계에는 인간에게 힘이 주어지지 않지만, 살아가며 어떤 행위를 하는 데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했다. 착한 행위를 하든 나쁜 행위를 하든 신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과학혁명의 광풍과 함께 신의 세계는 막을 내렸다. 이젠 신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 화산이 폭발하면 신이 화났다고 생각하는 상식 있는 문명인은 없다. 과학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과학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됐지만, 살아가고 어떤 행위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신을 위해 살았는데 그게 사라지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의미를 찾기 위해 인간은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를 발명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세 종류의 인본주의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평화가 찾아올 것을 핵심 아이디어로 삼는다. 현재는 '고객은 항상 옳다, 유권자는 항상 옳다'라는 인식으로 옮겨간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토대라 할 수 있다. 주로 개인의 판단과 감정에 집중하는데, 그러다 보니 개인의 아픔과 고통도 개인의 부족함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분이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개인 그 자체보다는 다른 개인과의 관계, 개인을 구성하는 사회에 집중한다.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청년실업이 대표적인데, 청년이 실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취업을 못하는 게 아닐 테다. 여긴 어떤 사회구조적 문제가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다. 사회적 환경과 성장 환경에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의 핵심 아이디어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본 것이다. 우월한 개체와 열등한 개체가 있다는 게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핵심이다.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우월해 군림하는 것처럼 인간 개체 안에서도 우월과 열등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건 우생학으로, 히틀러의 잔혹한 만행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표현이 종종 등장하는데, 작가는 '인본주의 종교전쟁'이라는 단어를 쓴다. 세계사는 인본주의 종교를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련이 등장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 인본주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강제노동 수용소보다 슈퍼마켓 힘이 더 컸다. 자유주의 인본주의는 자유시장 슈퍼마켓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했다. 다만, 이 전쟁에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 의료 등 기본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맞춰진 복지제도가 그렇다. 그런데 자유주의 인본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진화론에 의해 붕괴된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유의지'는 증명할 수 없는 <영혼> 같은 거라고, 자유의지를 오래된 관 속에 넣고 탕탕 못 박아 버린 것이 진화론이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p390)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약물, 유전학,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p393) EX. 로봇 쥐 실험 : 쥐의 뇌에서 감각 영역과 보상 영역을 찾아 전극을 이식해 통제한다. 쥐는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다 통제된 상태다. 따지고 보면 쥐의 욕망이라는 것도 뉴런 발화의 한 패턴일 뿐이다. → 인간에게도 같은 실험(치료)이 이뤄졌다. 뇌의 일정 부분을 자극해 사랑, 분노, 우울 같은 감정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를 인간 자체를 업그레이드하거나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하고 분석하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려 할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본주의란 종교는 이렇게 무너진다. 이미 꽤 많은 판단을 기계에 맡기고 있다. 운전을 할 때도, 보고 싶은 영화를 찾을 때도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맞춤형 길을 추천받는다. 어쩜 이렇게 잘 맞는지 놀라워하며 버튼을 누른다. 나에 대한 정보를 인공지능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정확하다. 끔찍한 상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스마트워치에 나의 모든 생물학적 반응, 생활패턴, 그동안 썼던 여러 글이 들어있다. 인공지능은 나를 나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내게 고백해 왔는데,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고민을 거듭해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판단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인공지능은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줄 것이다. 나의 생물학적 반응과 성격과 생활패턴의 일치 여부, 대화의 소재와 취미의 일치 여부 등 복합적으로 분석한 다음, "A를 만났을 때 좋을 확률(혹은 결혼해서 행복해할 확률) 60%, B를 만났을 때 좋을 확률(혹은 결혼해서 행복해할 확률) 88%" 이런 문구를 띄울 것이다. 인본주의가 무너져버린 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까.
인간은 그저 만물 인터넷을 창조하는 도구이며, 만물 인터넷은 결국 지구에서부터 은하 전체를 아우르고 나아가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런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마치 신과 같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고, 인간은 그 안으로 흡수될 것이다. (p521)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영화 <루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초인간이 되어 시스템 안으로 흡수돼버린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서로를 명확히 반영한 문장과 이미지다. 영화 <Her>도 떠오른다. 마지막 인공지능은 자신만의 세계로 떠난다. 나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여러 의문을 남기며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물을 뿐이다.